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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놀기/With family

[지리산3박4일] 수국이 수국수국했던...지리산 '구례수목원'

by 연승류 2020. 8. 30.

사주를 보러 갈 때면 역술가들은 늘 내게 '목(木)'의 기운이 많다고 했다. 땅을 새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나무처럼 시작을 잘하고 발산하는 성향이 있다고. 사주란 어디까지나 재미로 보는 토종 현실주의자 출신이지만, 마냥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나무와 내가 어떤 관계가 있기라도 한 건지 나는 나무가 좋다. 나무가 모인 숲은 더 좋다. 비오는 날 피톤치드 넘치는 안개 낀 숲을 걸으면 유독 '살아있음'을 느낀다. 혼자 여행을 떠날 때면 작은 돗자리를 메고 김밥과 간식을 사들고 꼭 그 동네 수목원에 가는 취미도 있다. 데크 위에 돗자리를 깔고 대자로 누워 길고 긴 하루를 보낸다. 숨 쉬고 책 읽는 게 전부이지만 어쩐지 친정에 와 있는 기분이다. 전생이 있다면 나는 나무가 아니었을까 하는, 감성 돋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여행 스타일이 꽤나 친자연적 류가네도 내 취향을 존중해준다. 가족 여행인데도 하루는 그 지역 수목원을 찾는다. 이번 지리산 여행에서 또한 마찬가지. 일찍 숙소에 들어와 쉬고 있자니 심심해진 우리 가족은 묵고 있던 지리산 온천 타운 근처 관광지를 찾아 나섰고 '지리산 구례수목원'을 찾아냈다.

 

온천타운쪽으로 올라가는 길 구석진 곳에 입구가 있는데 어려워 차로 한 번 헤매기도. 운영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국의 새 꽃말은 장맛비

 

분명히 입장료가 있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접수처에 사람이 없었다. 관광객들 또한 자유롭게 입구를 드나들고 있었다. 여전히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전날 비가 많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요란했던 장맛비로 인해 수목원 곳곳이 상처로 가득했다. 빗물에 쓸려 내려온 듯한 나뭇가지들이 정원 언저리에 쌓여 있거나 꽃이 심어져 있어야 할 자리가 듬성듬성 파여 있었다.

 

이날 수목원에서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은 수국밭. 파란색, 분홍색, 그도 아님 두 개를 합친 보라색. 갖가지 색을 입은 수국들이 수목원 입구에 만개해 있었다. 언니는 파란 수국의 꽃말이 '우울'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망울망울 각기 다른 모습으로 피어나 하나로 합쳐지는 이 한송이를 보고 어떻게 우울을 떠올릴 수 있냐며. 아마 꽃말을 짓는 사람이 수국을 처음 본 날 기분이 안 좋았던 모양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언니와 나는 수국의 꽃말을 다시 짓기로 했다. 상상력이나 수줍음 같은 말들로. 꽃말도 사람이 만들어낸 건데 뭐. 꼭 그 사람의 의견을 따를 필요가 있나.

 

나는 그새 '장맛비'라는 꽃말을 만들어내고는 퍽 마음에 들어 마음 속에 담았다. 수국이 피는 계절은 장마가 오는 계절이니까. 앞으로 내 머릿속에서 수국은 곧 장마와 연관검색어가 될 예정이다. 장마가 오면 수국이 피겠구나 생각하고, 수국이 피면 장마가 오겠구나 하련다. 수국을 보면서 예쁘다고만 생각해왔는데 의미까지 직접 지으니 어쩐지 꽃과 제법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아이 같은 엄마, 츤데레 아빠

수목원을 한 바퀴 크게 돌았다.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또 그렇게 좁지도 않았다. 1-2시간이면 모든 곳을 보고도 남을 만큼. 공원 옆쪽으로 산 길이 있어 살짝 오르기도 했다. 장맛비의 영향으로 계곡물도 흐르고 있었다. 산길에, 습하기까지 해서 그런지 버섯이 유독 많았다. 엄마는 손가락으로 옹기종기 피어난 버섯들을 가리키며 기뻐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고 웃었다.

 

키가 작은 엄마의 시선은 꼭 어린 아이의 시선 같다.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된 아가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걸을 때면 "이거 뭐예요? 저거 뭐예요?"하고 하도 묻는 탓에 평소 익숙하게 여겼던 꽃과 풀들까지도 특별하게 들여다보게 되는데 엄마와 다닐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버섯을 발견할 때면 보물이라도 발견 한양 기뻐하는 엄마 목소리에 아빠도 흙바닥 가장자리를 눈으로 살피기 시작한다. 풀 뒤에 숨은 화려한 버섯을 찾아내더니 "저기도 있네" 하며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가리키고 쓱 지나친다. 역시 츤데레 중의 츤데레가 아닐 수 없다.

 

삼나무가 모여 있던, 공원 뒷편 자연휴양림 근처도 한 바퀴 돌았다. 데크가 깔려 있어 걷기는 더 편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주기 위함인지 소나무, 삼나무, 솔방울 등으로 매미, 사마귀 등의 곤충 모형도 만들어놨더라. 도토리 집(?)에 들어가 사진도 한 장 남겼다. 

 

길을 걷다 나타난 의자에 우리는 오랜 시간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오랜만에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기로 했다. 매미소리, 새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발걸음 소리, 벌레들이 움직이는 소리, 부모님의 목소리. 그 모든 소리가 평온했다.


지리산구례수목원

 

입장료: 2000원(성인)

운영시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소요시간: 최대 2시간

※ 데크 및 앉아 쉴 공간 많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