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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놀기/With family

[지리산3박4일] The-K지리산가족호텔 온천이 '킬포'...언니에 대한 단상

by 연승류 2020. 8. 19.

 

 

식사를 끝내고 미리 예약해둔 The-K지리산가족호텔로 향했다. 우리가 이 호텔을 예약한 이유는 지금은 퇴직한 아빠가 30년 넘게 교직에 몸담은 덕분이다. 부럽게도 교직원공제회에서는 상당히 다양한 혜택을 제공해주고 있는데 그중 우리 가족이 가장 쏠쏠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 이 THE-K호텔이다. 

 

지리산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설악산, 경주, 제주도에도 있다. 퇴직 여부와 상관없이 선생님과 그 가족이라면 누구든지 The-K 호텔을 매우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4명이 묵을 수 있는 방을 '6만원'에 예약했다. 인당 1만5000원꼴이다. 요즘 게스트하우스도 이렇게 저렴한 곳은 없던데. 그야말로 꿀 혜택이 아닐 수 없다. 

호텔인 만큼 당연히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보니 가격은 6~8만원(4인 기준) 정도다. 선생님에게든 일반인에게든 cost-friendly한 호텔임은 틀림없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구조도 다 갖추고 있다. 주방과 거실, 화장실, 방까지. 주방에는 각종 조리 기구들도 있다. 냉장고는 작지만. 각 층 복도에 하나씩은 전자레인지와 정수기가 구비돼 있어 물을 굳이 사올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오래된 건물이라 시설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무엇보다 크기가 작은 편이다. 66 제곱미터라고 적혀 있으나 왠지 더 좁은 느낌이 든다. 크기가 작은 만큼 심리적 거리는 더 가까워진다는 장점은 있지만.

게다가 4명이 묵는데 침대도 하나뿐이다. 이럴 때마다 부모님은 늘 언니와 나에게 침대를 양보한다. 엄마 아빠는 바닥이 더 편하다면서. "엄마 아빠가 바닥에서 자는데 우리가 어떻게 침대에서 자"라고 말할 즈음이면 언니는 이미 침대에 누워있다. 얄미운 언니.

방에서 제일 좋은 건 ‘지리산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3박을 묵는 동안 아침에 눈을 뜨는 시간이 가장 기대됐다. 뽀얀 침구에 감겨 눈을 뜨면 푸르른 나무들과 지리산의 산세가 한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몇 가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매력 포인트 '온천'이 이 호텔의 모든 걸 커버해준다. 온천 사우나는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운영되며, 호텔 입구인 1층 복도 오른편에 위치해 있다.

사실 지리산 근처에 온천 마을이 있다는 사실도 이번 기회로 처음 알게 됐다. 숙박객이어도 온천 입장료로 7000원을 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다양한 온도의 탕과 노천탕까지 갖춰져 있어 값어치를 한다.

 

일반인도 1만원(지역주민 8000원)을 내면 이용할 수 있다. 노천 온천까지 있는 것치곤 저렴한 가격인지라 지역 주민들도 꽤 많이 방문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이 좌식 샤워실에 자신이 맡아둔 자리인양 짐을 잔뜩 깔아둔 건 별로였지만.

 

내가 갔을 때는 한창 비가 오던 시점이었다. 비가 거세게 오는데 노천 온천을 했다. 얼굴이 따가우니 수건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몸 위로 떨어져 흘러내리는 빗방울의 촉감을 느꼈다. 빗소리, 빗물이 온천수에 닿아 튀기는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냉탕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의 발차기 소리 등이 겹치면서 소란스러웠지만 꽤나 운치 있는 경험이었다. 어느 새 지리산 위로 자욱한 안개가 떠오르고 있었다.  


더케이지리산가족호텔(3성급)

 

위치: 전남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온천로 317

전화번호: 061-783-8100

가격: 6~8만원(4인 기준)

주변 관광지: 광한루(차로 25분 거리), 노고단(차로 30분 거리), 화엄사(차로 35분 거리)

시설: 온천(방문객 7000원, 일반인 1만원), 편의점

 

더케이호텔 홍보 사진 캡처

 

언니와 나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32평에 살던 우리 가족은 그후로 48평으로 이사하면서 낮아진 밀도만큼이나 서로에게 거리감이 생겼다.

 

특히나 언니와는 더 그렇다. 물론 각기 다른 두 공간에서 지낸 '나이대'가 다른 탓도 있다. 어렸을 때야 워낙 우리가 공유하고 있던 시간이 많았다. 추억도 그 시간에 비례했고. 유치원 끝나고 돌아오면 집에는 늘 언니가 있었다. 당시 언니는 꽤나 저돌적인 편이었는데 적어도 지금처럼 소라게마냥 방에만 박혀 지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언니는 놀이기구를 타는 걸 좋아했다. 긴 색색깔 미끄럼틀이 있는 성저공원쪽 놀이터나 발을 양 옆으로 구르면 체감상 지상에서 90도 높이까지 올라갔던 '호박 그네'가 있는 중앙공원으로 나를 데려갔고 우리는 스릴을 즐겼다. 실은 언니만 즐겼다. 당시만 해도 나는 꽤 겁쟁이었으니까.

 

언니와 나는 매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마다 트리를 꾸몄다. 트리 주변에 전구를 설치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올해는 산타클로스에게 어떤 선물을 받을 수 있을지 기대된다며 대화도 주고받았다. 부모님의 깜짝 연기 덕분에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산타클로스를 믿었다. 또 언젠가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안방에서 함께 춤을 연마해 엄마 아빠가 지켜보는 앞에서 공연을 해 보이기도 했다.

 

언니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추억 중에 '햄스터'도 빼놓을 수 없다. "집 안에서 절대 쥐새끼를 기를 수 없다"는 아빠에게 사정해 겨우 기르게 된 햄스터를 언니와 나는 참 많이 아꼈다. 언니 햄스터는 주리, 내 햄스터는 릴리. 유명 일본 만화 웨딩피치의 주인공인 릴리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주리와 릴리를 데리고 집 뒤쪽에 있는 성저공원을 자주 찾았다. 주리의 생일(?) 때는 햄스터 둘을 가슴팍에 소중히 안고 공원을 찾았다가 키높이에서 주리를 바닥으로 떨어트리는 참사를 벌이기도 했다. '찍' 소리를 내며 뻗어있는 주리를 보고 언니와 내가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는지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와 나는 그렇게 소중했던 햄스터에 대한 관심을 끄고 바깥에 방치하기 시작했다.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배우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바닥재도 갈아주지 않았고 먹이도 주지 않았다. 사나웠던 주리는 릴리와 마루를 물어 죽였고 주리를 집 주변에 방생하는 것으로 우리의 육아일기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그 후로 더 많은 일이 있었겠지만 여직 머릿속에 진한 색감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그와의 추억은 이 정도다. 48평 아파트로 이사 오고나서부터 언니와 나는 각방을 쓰며 각자의 사춘기를 지나 보냈기 때문이다.

 

둘 모두에게 중학교, 고등학교는 쉽지 않았다. 언니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외모가 특출 나다는 이유 아닌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 언니의 사진은 당시 SNS인 '버디버디'를 돌아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누군가는 언니를 비난하기 위해 "냄새난다"며 트집을 잡았고 그 후로 언니는 냄새에 집착하는 마음의 병을 안게 됐다. 언니는 가족과 여행을 때날 때도 자신의 자리에서 늘 0.5cm 만큼 창문을 열어두고 있다. 

 

내게는 행복하기만 했던 중학교 시절이었기에 당시 나는 언니의 마음 고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쉬운 친구들과의 관계가 언니에게는 왜 그렇게 어려운지 의문이었다. 내심 언니의 까탈스러운 성격 탓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곧이어 내게도 위기의 시간이 다가왔다. 내게 고등학교 시절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 아린 기억이다. 전교회장에 교환학생까지 역임하며 겉보기엔 우수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거의 3년에 걸쳐 반 친구들로부터 은근한 따돌림을 당했고 그로 인해 자존감은 깎여내려가다 못해 소멸 직전이었다. 특히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최악의 담임선생님을 만나 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매일 죽음을 상상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의 나는 스스로를 참 많이 원망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좀먹는 동안 대학교 1학년 한창 때를 즐겼던 언니는 힘들어하던 그때의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언니와 나는 서로의 방에서 시차를 두고 어쩌면 서로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상처는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누구 먼저 서로의 방을 찾지 않았고 오히려 걸쇠를 걸어 잠그기까지 했다. 그러다 나는 재수 생활을 거쳐 내 편을 들어주는 소중한 친구를 만났고 언니는 대학교를 입학하자마자 남자친구를 사귀며 '마음 치유'를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길을 떠나온 우리였다. 

 

성인이 되어 어느 날은 문득 그런 생각까지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나는 고아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언니는 과연 내 마음속에서 몇 평쯤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또 나는 언니에게 몇 평짜리 동생인 걸까. 친족인 언니와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슬프고 아프다.